반도체 전쟁, 따돌리려는 미국과 따라가려는 중국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이야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두 나라 미국과 중국이 다툰다는 이야기도 너무나 커다랗고, 최첨단 산업의 근간인 반도체 시장의 향방도 가늠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매일 뉴스는 쏟아지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조망하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오늘 <국제 한입>은 미·중 반도체 전쟁의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짧은 글에 거대한 이야기 전부를 적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황이 돌아가는 흐름만큼은 담을 수 있을 테니까요. 목표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겁니다. 왜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를 두고 다투는 걸까요? 그리고 둘은 반도체 전쟁에서 어떤 전략을 택했을까요? 배경: 미·중 갈등의 격전지 된 반도체 미국과 중국의 기 싸움은 전방위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중 가장 치열한 전장을 꼽으라면 반도체 산업이라 말할 수 있는데요. 자연스레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하필 반도체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반도체 산업이 굴러온 방식과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구조. 반도체를 생산하는 과정에 다양한 국가가 참여하는 걸 볼 수 있다.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글로벌 분업: 반도체는 다양한 재료와 장비를 사용하고, 또 수많은 공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데요. 그 복잡한 생산 과정이 한 기업, 한 국가 안에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여러 국가가 각자 특화된 분야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반도체 공급망을 굴리고 있죠. 이를테면 반도체 설계는 미국이 잘하고, 제조는 대만과 한국이 앞서가며, 일본은 소재, 유럽은 장비에서 우위를 보이는 식입니다. ️⚠️ 흔들리는 공급망: 이러한 구조는 꽤나 효율적입니다. 여러 기업과 국가가 각자 잘하는 일에 집중하며 협력하니 전 세계 차원에서 반도체가 효율적으로 공급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건 공급망이 원활하게 작동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 년간 반도체 공급망이 휘청이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요. 분업이 단계별로 짜여 있다 보니 그중 한 단계가 멈추면 전 과정이 함께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 미국의 위기감: 지금까지 미국의 여러 기업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설계와 연구 및 개발에 몰두해왔습니다. 애플이나 엔비디아 같은 기업은 설계 이후의 공정, 그러니까 제조(파운드리)나 패키징, 검수를 대만, 한국, 중국 같은 동북아 국가에 맡겨왔죠. 설계가 그 뒤의 공정보다 더 큰 부가가치, 즉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그 결과, 미국은 공급망의 불안정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국내에서 모든 생산 과정을 담당할 때와 달리, 국경 밖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미국은 반도체를 구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죠. 📱 첨단 기술의 필수재: 문제는 반도체가 첨단 산업 어디에든 쓰인다는 사실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자동차, 서버 등등 당장의 산업을 가동하는 데도 필요하고, AI처럼 미래의 핵심이 될 기술을 육성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 첨단 무기 체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도 필요불가결한 부품이 됩니다. 요컨대 반도체가 없으면 국가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말인데요. 2021년 바이든 대통령이 발표한 '미국 공급망에 관한 행정명령'. 팬데믹과 기후 변화, 지정학적 경쟁 등의 위험 요인을 열거하며 미국이 안전하고 회복력 있는 공급망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 The White House 😤 효율성보단 안정성: 결국 미국은 깨달았습니다. 효율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 설령 효율을 포기하더라도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게 급선무라는 사실을 말이죠. 이제 미국은 다른 국가와 협력하는 것보다도 자국 내로 반도체 공급망을 끌고 오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의 역할을 대체(디커플링)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데요. 중국과 살벌하게 다투는 와중에 반도체가 인질이 되는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 패권을 둘러싼 다툼: 한편으로는 반도체 산업의 안정을 추구하는 걸 넘어, 패권을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반도체는 국가 산업과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산업입니다. 그러니 만약 중국이 반도체 산업을 키워내지 못한다면 미국의 경쟁자로 떠오르는 일도 없겠죠.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틀어막음으로써, 기술, 산업, 국방 등 국가 발전 전략 대부분을 무력화하고자 합니다. 어떻게든 중국 반도체 산업의 싹을 자르고 싶어 하죠. 미국: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 미국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중국이 반도체 기술을 획득하지 못하도록 막고, 자국은 범접하지 못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는 거죠. 이를 위한 미국의 움직임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원, 제재, 외교인데요. 미국 내로 공급망을 끌어오고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지원'하고, 중국은 생산 시설과 기술을 갖추지 못하도록 '제재'하며, 이러한 정책에 동맹국이 동참하도록 적극적으로 '외교'하고 있습니다. 작년 8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에 서명하는 모습. ⓒ 'CBS NEWS' Youtube 💰 무려 2,800억 달러: 작년 8월 미국은 일명 '반도체 지원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으로 움직이는 돈만 수백조 원을 웃돌 만큼 무게감이 남달랐는데요. 다양한 내용을 담았지만 요점은 간단합니다. 첫째, 주요 반도체 제조 기업을 미국으로 불러들입니다. 미국 내에 제조 시설을 두는 기업에 보조금(약 51조 원)을 제공하고 세금을 감면(약 31조 원)해주기로 했죠. 둘째,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에 대폭 투자합니다. 약 17조 원을 들여서 미국의 반도체 기술 우위를 유지하고자 하는데요. 📃 비우호국 내 투자 제한: 이렇게 파격적인 투자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이 법으로 지원을 받은 기업은 중국에 생산 시설을 새로 짓거나 늘릴 수 없는데요. 메시지는 노골적일 만큼 선명합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으면 중국과는 연을 끊으라는 거죠. 미국의 지원책으로 인해 주요 반도체 기업은 미국에 설비 투자를 늘릴 걸로 보인다. ⓒ 'YTN' Youtube 🏭 주요 기업의 미국행: 실제로 기업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반도체 기업은 주로 동북아에 제조 설비를 두었습니다. 특히 생산 단가를 줄일 수 있는 중국에 공장이 많았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대만의 파운드리 업체 TSMC는 약 52조 원을 들여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세우고, 삼성전자도 향후 20년간 252조 원을 투자해 텍사스에 11개 공장을 지을 계획입니다. 🚫 수출 규제: 바이든 정부는 전임 트럼프 정부의 뒤를 이어 중국에 강력한 수출 규제를 걸고 있습니다. 작년 10월에는 최첨단 반도체 칩을 만들기 위한 장비를 중국에 판매하는 걸 금지했습니다. 반도체 중에서도 7nm 이하의 초미세 공정을 돌릴 수 없도록 막은 건데요. 장비 수출만 막은 게 아닙니다. 미국의 장비와 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반도체도 중국 기업에 수출할 수 없도록 막고 있죠. 심지어는 미국 시민이나 영주권자가 중국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지도 못하게 하기도 했는데요. 한마디로 말해, 중국이 반도체를 만들지도, 반도체를 사용해 제품을 만들지도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 동맹국 참여: 미국의 견제는 집요합니다. 자신뿐 아니라 동맹국도 이런 제재에 동참시키고 있는데요. 최근엔 일본과 네덜란드가 장비 수출 통제에 참여한다는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현재 반도체 장비 기업의 1위부터 5위까지가 미국, 일본, 네덜란드 국적 기업입니다. 이 세 나라가 수출 통제에 나선 이상 중국은EUV, DUV 등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장비를 구할 길이 없어졌죠. 👥 동맹국으로 꾸린 공급망: '칩4(CHIP4)'도 이런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칩4는 미국, 일본, 대만, 한국이 완결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꾸리겠다는 구상인데요. 미국이 믿을 수 있는 우방 사이에서만 반도체 분업을 하겠다는 계획이고, 또 한편으로는 중국을 공급망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중국: 반도체 굴기 위해선 자립해야 중국으로선 갑갑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반도체 산업을 키워오고 있었는데, 세계 패권국이자 반도체 업계의 선두 주자 미국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견제에 나섰으니까요. 중국에 남은 선택지는 하나입니다. 미국 공급망 밖에서 어떻게든 힘을 기르는 거죠. 💰 국가가 키운 반도체: 중국은 20세기부터 반도체 산업 육성에 열을 올려왔습니다. 미래에 자국의 국력을 결정할 핵심 산업으로 상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지원했는데요. 특히 2014년부터는 반도체 기금을 조성해서 어마어마한 액수의 지원금을 쏟아부었습니다. 2014년부터 시작된 1차 기금의 규모는 1,387억 위안(약 250조 원)에 달하고, 2019년 발족한 2차 기금은 2,000억 위안(약 368조 원)을 넘었죠. 중국의 집적회로(IC) 산업은 매년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 인천연구원 📈 성장 추이: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거의 매년 20%의 확장을 이뤄왔는데요. 특히 반도체 후공정(반도체 조립, 패키징, 검수)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 점유율 38%에 이르렀습니다. 반도체 위탁생산, 즉 파운드리에서도 작년 세계 시장 점유율 10%대로 올라섰죠. 아직까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선두엔 미국, 대만, 한국 등이 있지만, 2010년대와 2020년대 들어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국가는 분명 중국입니다. 🤦 약점 찔린 중국: 하지만 그런 중국에도 약점이 있는데요. 중국은 아직 설계와 장비 같은 핵심 분야에서 첨단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이 반도체 제조에서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뤘다 해도, 이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외국의 설계 기업, 장비 기업과의 교역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죠. 그런데 미국이 그 정곡을 찌른 겁니다. 미국과 동맹국으로부터 장비와 기술을 받지 못한다면 중국의 성장에는 큰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 현실화하는 피해: 중국의 피해는 만만치 않을 걸로 보입니다. 당장 중국 파운드리 기업은 제조 장비를 수입하지 않고선 미세 공정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유력 파운드리 업체 SMIC의 생산 수준이 10년 전까지 후퇴할 수 있다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2021년 미국의 제재로 인해 중국 내 최대 반도체 기업인 하이실리콘이 무너진 것처럼 중국 반도체 산업에 큰 타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년 10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과학기술의 자립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 'France 24 English' Youtube ✊ 자급화 전략: 암울한 상황이지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핵심 기술을 해외에 의존해서 이 문제가 벌어진 셈이니, 이제는 외국에 의존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는 건데요. 중국은 핵심 기술 및 공정을 국산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가의 자금 투자의 방향도 달라졌습니다. 중국이 해외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설계, 장비, 소재 분야에 대폭 투자하기로 했죠. 최종적인 목표는 미국이 문을 걸어 잠근 글로벌 공급망을 떠나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체 공급망을 확보하는 겁니다. 🤔 승자는 누가 될까?: 중국의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편에서는 미국의 제재가 결국은 중국의 자립화를 앞당기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경고합니다. 작년 8월엔 SMIC이 네덜란드의 EUV 장비 없이 7nm 공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보도된 것처럼 말이죠. 반면 설계와 장비 기술은 그렇게 단시간 내에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SMIC의 성과만 해도 7nm 공정의 수익성을 확보하기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건데요. 중국이 핵심 기술을 개발할 때까지 글로벌 공급망 밖에서 버틸 수 있을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입니다. 커다란 그림을 알고 나면 이제 우리가 선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두 고래 사이에 끼어버린 새우, 한국을 말하는 건데요.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 사이 난감한 상황에 부닥쳐 있습니다. 대만, 일본을 따라서 오랜 우방 미국에 동조해야 할 것 같다가도,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 중 약 40%가 중국으로 향하는 걸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하죠. 반도체가 중요한 만큼, 우리나라가 이 위기를 어떻게 건너가는지가 향후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것 같습니다. 💡3줄 요약! 국제 분업을 통한 효율성보다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을 추구하는 미국 지원, 제재, 외교 등 전방위적 수단 동원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는데 큰 타격을 입게 된 중국, 관건은 핵심 기술을 국산화할 수 있을지 여부 Reference 김용균·최세중(2022), 미국 「반도체와 과학법」의 주요 내용과 영향, 나보 포커스 제50호. 경희권(2022), 미국 ‘반도체와 과학법’의 정책적 시사점, i-KIET 산업경제이슈 제141호. 김양팽(2022),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움직임과 정책적 시사점, i-KIET 산업경제이슈 제137호. 조은교(2022), 중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현황과 시사점, 인천연구원 INChinaBrief 414호. 조은교(2022), 중국 반도체산업의 공급망 현황과 자립화 전략, KIET 산업경제. 도원빈·김경훈(2022),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따른 한국의 기회 및 위협요인, 한국무역협회 Trade Focus 제35호. 경희권·이준(2021), 바이든 반도체 공급망 조사 행정명령의 함의와 한국의 대응방향, KIET 산업경제. 정형곤 외(2021),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어요